
서비스의 l10n 작업을 외주로 진행할 기회가 있었다. 주제는 경조사 비용 관리. 한국에서라면 사회생활을 하는 이상 한 번은 반드시 마주치는 돈의 흐름을 정리해주는 서비스였다. 목표 국가는 일본.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나라이자, 지리적으로 가깝고 문화도 비슷하다고 생각해왔던 나라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이렇게 생각했다.
- 번역 리소스를 정리하고
- 일본어로 자연스럽게 옮기고
- 몇 군데 표현만 다듬으면 끝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이 일은 언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당연함을 옮기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그 당연함은 생각보다 쉽게 깨졌다.
i18n과 l10n: 어디서부터 다른가
l10n과 i18n은 각각 Localization과 Internationalization을 축약한 용어다. 둘 다 "해외로 나간다"로 묶이지만 출발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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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18n(국제화): 여러 언어를 수용할 수 있도록 제품의 구조를 먼저 만드는 일 예) 문구를 코드에서 분리하기, 날짜/통화 포맷 표준화, 언어 길이에 UI가 깨지지 않게 레이아웃 설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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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10n(현지화): 그 구조 위에서 특정 지역의 언어와 문화를 반영해 제품을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만드는 일 예) 같은 뜻이라도 그 사회의 예의, 거리감, 표현 습관에 맞게 문구와 흐름을 재구성하기
"한국에서 잘 되는 제품도 해외의 문화와 조건을 만나면 차별점이 사라질 수 있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땐 조금 추상적으로 들렸는데, 이번 작업을 하며 그 문장이 굉장히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번역이 틀려서가 아니라 사용자가 익숙한 "문장 온도"와 "관계의 규칙"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번역 전에 먼저 정한 것
번역을 시작하면 보통 바로 단어부터 고치고 싶어진다. 나는 그 전에 한 문장을 먼저 프롬프트(작업 지침)에 적었다.
"이번 작업의 핵심은 번역이 아니라, 관계와 예의의 규칙을 UI로 구현하는 것이다."
경조사 서비스는 특히 더 그렇다. 사용자가 입력하는 건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사실상 관계의 기록이다. 여기서 한 번 문구가 어긋나면 사용자는 기능보다 먼저 "이 서비스, 나를 잘 모르네"를 느낀다.
그래서 나는 작업을 "번역 태스크"가 아니라 아래의 질문으로 재정의했다.
- 이 화면에서 사용자는 지금 정보를 정리하는가, 아니면 관계를 표현하는가?
- 이 문구는 더 친절해야 하는가, 더 단정해야 하는가?
- 이 기능이 "편리함"으로 설득될까, 아니면 "예의"로 설득될까?
이 질문이 정리되면 그 다음부터는 라이브러리나 번역 품질보다도 텍스트의 기준이 먼저 서기 시작한다.
비슷해서 더 어려웠던 차이들
한국과 일본은 경조사라는 큰 범주에서 교집합이 많다. 결혼, 장례, 축하/위로 등 비슷한 이벤트가 존재한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비슷하겠지"라는 가정이 생기기 쉽고 그 가정이 오히려 자연스러움을 망치기도 했다.
내가 크게 부딪힌 지점은 세 가지였다.
1) 무엇을 "기록의 단위"로 볼 것인가
한국에서는 "경조사"를 하나의 큰 카테고리로 뭉쳐도 사용자가 맥락을 알아서 보완해준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같은 범주로 묶어도, 사용자가 떠올리는 장면이 다르거나 어떤 이벤트는 아예 다른 결로 다뤄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한국의 "돌잔치"나 "환갑잔치"는 명확한 경조사 카테고리지만, 일본에는 이와 정확히 대응하는 행사가 없다. 대신 "初節句(첫 명절)", "七五三(시치고산)" 같은 일본 고유의 의례가 있고, 또 "法要(법요, 불교식 추도 의식)"처럼 한국에서는 장례의 연장으로 보는 것을 별도 카테고리로 다뤄야 했다.
구조가 바뀐 사례도 있었다. 한국어의 행사 분류는 "돌, 환갑, 칠순, 팔순" 같은 연령 중심의 한국식 행사가 들어간다. 반면 일본어에는 "法要, 内祝い, お中元・お歳暮, 快気祝い" 같은 일본 생활문화의 단위가 들어간다. 즉, 같은 앱인데 기록해야 할 사건의 종류 자체가 달라졌다. 이건 번역이 아니라, 분류 체계의 재설계였다.
2) 호칭은 언어가 아니라 거리감이다
한국어는 비교적 빠르게 친밀해질 수 있는 언어다. 반면 일본어는 거리감을 유지하면서도 충분히 정중할 수 있는 장치가 촘촘하다. 사전이 아니라 사회가 정해주는 기본적인 거리 감각을 계속 의식해야 했다.
한국어에서 "축하합니다!"라고 쓸 수 있는 곳에서, 일본어로는 "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와 "おめでとう"의 선택이 생긴다. 전자는 정중하지만 약간 딱딱하고, 후자는 친근하지만 경조사 맥락에서는 가볍게 들릴 수 있다. 결국 서비스 톤에 따라 "이 앱은 사용자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가"를 먼저 정해야 호칭이 정해졌다.
- 너무 친근하면 가볍게 느껴지고
- 너무 딱딱하면 차갑게 느껴진다
3) "맞는 말"이 "좋은 말"이 아닐 때
특히 어려웠던 건 문자 메시지 추천 같은 영역이었다. 한국어로는 무난한 문장도 일본어로 옮기면 과하거나 직설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반대로 지나치게 완곡하면 "왜 이렇게 멀어 보이지?" 같은 느낌이 생기기도 한다.
한국어에서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항상 행복하세요"라고 쓸 수 있는 메시지를, 일본어로는 "ご結婚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末永くお幸せに(오래도록 행복하시길)"라고 써야 자연스럽다. "항상"이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いつも"가 되는데, 이건 일상적인 인사에 쓰는 말이지 경조사 메시지에 어울리지 않는다. 대신 "末永く(오래도록)"라는 관용 표현을 써야 예의를 갖춘 메시지가 된다.
여기서는 단순 번역이 아니라, 현지의 의례 문장을 다시 조립하는 감각이 필요했다.
덜 헷갈리게 만들기 위한 기준
작업을 하면서 나를 가장 많이 구해준 건 "감"이 아니라 "기준"이었다. 나는 모든 문구를 아래 체크리스트로 다시 봤다.
- 이 문구는 정보 전달인가, 관계 표현인가? (둘 다라면 비중은?)
- 사용자가 이 순간 느끼는 감정은 무엇인가? (축하/위로/부담/조심스러움)
- 문장의 온도가 과한가, 부족한가? (친근함/정중함/단정함)
- 같은 의미라도 현지에서 더 흔한 패턴이 있는가? (관용 표현/문장 길이/마무리 방식)
- 이 표현이 "맞는지"보다, 자연스러운지를 검증할 루프가 있는가?
이 체크리스트는 단순히 문장을 다듬는 도구가 아니라, 협업하는 사람과 소통할 때도 유용했다. "왜 이렇게 바꿨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UI가 개인 취향이 아니라 제품의 결정이 된다.
문법이 아니라 "문화"가 바뀌는 예시들
아래는 실제 한국어/일본어 리소스에서 뽑아온 사례다.
핵심은 "뜻이 맞느냐"가 아니라, 그 사회가 기대하는 예의의 기본값을 맞추는 일이었다는 점이다.
예시 1) "친절함"이 아니라 "거리감"의 기본값
- Before(ko): "{name}님"
- After(ja): "{name}様"
한국어의 "님"도 충분히 정중하다. 하지만 일본어에서는 기본적인 호칭의 거리감이 더 멀다. 그래서 같은 "존칭"이어도 일본어는 공식적인 표준값으로 고정된다.
이건 단어 번역이 아니라, 관계의 규칙을 맞추는 작업이었다.
예시 2) 문장 온도의 기본값
- Before(ko): "문구가 복사되었어요"
- After(ja): "文がコピーされました"
한국어의 "~했어요"는 친근한 기본값이다. 하지만 일본어 UI에서는 그 친근함이 불필요하게 가깝게 들릴 수 있다. 그래서 공지체/정중체로 톤을 내리는 선택이 기본이 된다.
이건 문법이 아니라 사회적 기본 온도의 문제다.
예시 3) 조의 문장의 "의례 표준"
- Before(ko): "{sender}의 {relation}이신 故 {deceased} 님께서 별세하셨기에 삼가 알려드립니다."
- After(ja): "{sender}様の{relation} 故{deceased}様が逝去いたしましたので、謹んでお知らせ申し上げます。"
뜻은 같다. 그런데 일본어는 의례 문장에 쓰는 정형 표현이 있다. "謹んで / 申し上げます" 같은 표현을 넣지 않으면 예의가 빠진 문장처럼 느껴진다.
즉, 번역이 아니라 의례의 규칙을 UI에 심는 일이었다.
마무리
l10n은 언어가 아니라 당연함을 번역하는 일이다. 그리고 서비스가 해외로 간다는 건, 그 당연함을 다시 배우는 일이다.
다음에 또 다른 지역의 l10n을 하게 된다면, 나는 언어별로 JSON을 번역하는 작업부터 하지 않을 것 같다. 먼저 "이 서비스는 이 문화에서 어떤 표정으로 쓰여야 할까?"를 적어두고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