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MD가 개발자가 된 이유

최근 나의 시간은 딱 두 가지로 나뉜다.

SSAFY에서 프로젝트를 하는 시간, 개발자의 첫 커리어를 위한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자기소개서룰 작성하는 시간.

패션 업계에서 일하면서 내가 이뤄왔던 것들과 개발자가 되기 위한 결심 과정까지의 어떤 경험들이 있었고 성장 과정이 있었는지 정리해보았다.

1. 일에 대한 철학

'나는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겠다.

일이란 나에게 단순히 경제활동을 넘어서 성취감을 제공하는 삶의 중요한 요소다.

흔히 말하는 워라밸을 추구하기보다는, 일과 삶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된 나의 삶의 중심이었다.

첫 직장으로 패션 업계를 선택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통해 성취감을 얻는 것, 그것이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

그러나 다양한 경험들은 나의 시야를 넓혀주었고, 나는 더 깊은 열정을 느끼는 분야를 발견하게 된다.

2. 패션 이커머스 플랫폼에서 일하며

kiko

나는 아직도 패션을 좋아한다.

트렌드를 읽고, 시장의 방향을 예측하는 건 언제나 즐겁다.

나는 등산, 캠핑과 같은 아웃도어를 정말 좋아하는데, 내가 구매하기 위한 등산 및 캠핑 장비들을 디깅하고 브랜드를 분석하며 얻은 다양한 인사이트들을 바잉 MD들에게 제안해서 실제로 바잉이 이루어진 적도 있다.

당시 Kiko Kostadinov를 필두로 국내에 고프코어 트렌드가 정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는데, 당시 주시하고 있었던 브랜드들에 대해 MD들과 커뮤니케이션도 자주 했었다.

그때 내가 바잉을 제안하고 테스트 오더를 진행했던 브랜드가 Norda, ROA, Satisfy, DV, Soar, On 등이 있었는데, 현재 이 브랜드들이 시장을 주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괜히 마음이 뿌듯하다.

담당 업무의 범위를 넘어서 주도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진 건, 이 때가 계기가 된 것 같다.

고객 경험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

정말 많은 브랜드의 흥망성쇠를 최전선에서 바라보며 브랜딩이란 무엇인가를 많이 고민했다.

어떤 물건이 잘 팔리고 있고 앞으로 잘 팔릴까를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브랜드 혹은 플랫폼이 고객에게 주는 가치를 분석하는 일이 단순히 패션이라는 산업을 넘어, 모든 분야에 적용되는 법칙이라는 것도 알게되었다.

이 생각은 내가 고객 중심으로 업무를 생각하는 자세를 갖게 했다.

특히 나는 플랫폼을 이용하는 고객 여정을 검토하는 것을 즐겼다.

단순히 내가 몸 담고 있는 플랫폼만 아니라, 그냥 일상에서 이용하는 모든 플랫폼의 유저 플로우를 관찰하는걸 좋아했다.

이를테면 '이 버튼은 이쪽에 있는 것이 더 편하지 않을까?', '이 화면은 다음 단계에서 보여주는게 더 직관적이지 않을까?'와 같은 UI/UX 분석을 즐겼다.

이와 관련한 두 가지 업무가 기억에 남는다.

고객 경험을 위한 UI 개선

okmall-color

같은 상품의 여러 색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UI를 개선했었다.

대부분의 아이템들은 시즈널 컬러에서 시즌 재고가 많이 남는 경향이 있는데, 인기순으로 보여주던 당시의 노출 알고리즘으로는 시즌 재고를 소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를 개선하고자 메인 컬러 아이템의 상세 페이지에서도 다양한 컬러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접근 가능하도록 UI를 개선하여 가격 비교 전략을 통한 상품 회전율 상승에 기여했었다.

고객을 위한 단순한 UI가, 예상하지도 못한 팀의 성과에 기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인상깊었다.

okmall-textile

다음으로 고객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 20년 넘게 쌓여진 소재 정보 데이터를 재정비했다.

당시의 소재 데이터 셋에는 '폴리에스테르-폴리에스터', '엘라스틴-엘라스텐-엘라스테인'과 같은 같은 소재의 중복 표기와 '스판덱스-라이크라-엘라스틴-폴리우레탄-탄성섬유'처럼 국가 및 상표 별 다른 표기법들이 혼재해 있었다.

상품 페이지에 노출시키기 위해 실무자들이 등록하는 과정에서, 저마다 각자의 기준으로 소재를 선택하고 있었으며, 이는 고객의 입장에서는 혼란이었다.

실제로 가장 많이 받는 고객문의 중 하나가 소재 정보였는데, 이 작업을 통해서 고객 문의를 월평균 20% 감소시킴과 동시에 팀 내부적으로도 업무의 객관적인 기준을 세울 수 있었고, 신입 사원 온보딩 과정의 교육 자료 개선의 성과도 이뤘다.

업무 프로세스 단순화를 위한 사내 툴 개선

근무 당시, 상품 등록 업무는 반복적이지만 팀의 일과 시간 대부분을 차지하는 업무였다.

생산성을 개선하기 위해 업무 플로우를 직접 검토했고, 결과적으로 사용하지 않지만 남아있는 UI들, 파편화되어 있지만 하나로 합쳐도 무방한 프로세스들을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설득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문제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데이터를 근거로 제시했고, 내가 속한 팀의 목표와 성과가 회사 전체의 성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강조했다.

상품 등록 업무는 내 책임이었지만, UI와 화면을 재구성하는 것은 PM과 개발자의 몫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불편하다'는 이유로 협업을 요청할 수 없었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성공적으로 협업을 이끌어냈고, 결과적으로 모두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3. 패션 B2B 스타트업에서 일하며

이커머스 플랫폼에서 B2B 스타트업의 소싱 MD 포지션으로 이직했다.

이직 과정에서 HR 매니저와 이야기를 나누며, 지금의 회사에 패션 업무와 함께 비즈니스 모델과 사내 업무 프로세스를 고도화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해주었고, 이 일이 내가 즐길 수 있는 일이라 확신했다.

따라서 첫 직장에 비해, 새 직장에서는 보다 주도적이고 자율적으로 업무를 진행할 수 있었다.

VBA 코드를 이용한 엑셀 매크로 개발

당시, 주요 담당 업무이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업무는 해외의 담당 거래처에서 넘어오는 엑셀 파일들을 가공해서 플랫폼에 등록하는 업무였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이스라엘, 독일,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엑셀 파일이 저마다의 양식으로 도착하지만, 모든 파일들을 하나의 포맷에 담아낼 수 있어야 했다.

내가 입사했을 때 온보딩 받은 업무 방식은 수동으로 컬럼을 하나씩 수정하고, 민감한 정보가 담겨있는 정보를 일일이 삭제하는 방식이었는데, 이 작업에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이 비효율성을 개선하고자 나는 VBA 매크로를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VBA 코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지만 야근이 즐거웠다.

내가 만든 매크로가 팀원들에게 공유되어 팀을 이롭게하고, 나에게 고마워하는 모습을 상상했을 때 야근하는 스스로가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매크로를 완성하는데 약 2주의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처음에는 '혼자서 개발하는 것이니까, 금방 끝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프로토타입으로 팀의 피드백을 받고, 더욱 고도화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더 걸렸다.

결과적으로 이 매크로는 기존의 업무 시간을 200% 이상 효율화했다.

더 의미있는 것은, 기존에는 수동으로 작업했기 때문에 작업자가 업무에 시간을 할애해야했지만, 매크로를 사용하면 업무를 백그라운드화 할 수 있기 때문에 업무 유연성도 크게 개선되었다는 점이다.

데이터 드리븐을 위한 대시보드 개발

excel dashboard

매크로로 인해 주니어급 MD들의 업무가 여유로워지자, 팀의 시니어 MD들은 본인들의 업무를 조금씩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 때 배정받은 업무가 해외의 거래처와 직접 커뮤니케이션하며, 필요한 브랜드들을 요청하고, 요청한 브랜드의 엑셀 파일들을 수급하는 업무였다.

이직 후 2개월 정도 지났을 때, 담당하는 거래처가 점차 증가하며 특정 브랜드가 어느 거래처에서 좋은 거래 조건으로 소싱할 수 있을지 기억력으로 커버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당시 팀의 내 사수가 데이터 분석에 관심이 많았었는데, 서로 같은 페인 포인트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자주 커뮤니케이션하며 페인 포인트들을 수집했다.

그 결과, 거래처가 가지고 있는 모든 브랜드, 거래처가 강점을 가지고 있는 브랜드(거래 조건이 좋은 브랜드), 거래처 및 브랜드 별 거래 조건, 우리가 거래를 성사시켰던 거래 조건, 거래처 별 담당자 연락처 등 거래처의 모든 정보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대시보드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엑셀을 기반으로 대시보드를 구현했다.

함수가 복잡하기는 했지만 사수와 나 둘 다, 엑셀에는 자신이 있었고, 플랫폼을 통해서 추출하는 데이터 역시 엑셀로 받아올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엑셀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둘만 담당하던 거래처의 최근 데이터들을 엑셀에 집어 넣고, 수년간의 데이터를 집어 넣고, 팀의 다른 사람들의 거래처 데이터까지 집어 넣으며 대시보드가 점점 무거워졌다.

무거워진 대시보드는 필터링하는데 너무 시간이 오래걸려, 더이상 데이터 기반의 신속한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대시보드의 핵심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AWS QuickSight로의 마이그레이션과 CRM 대시보드로의 고도화

이를 해결하고자 사수와 나는 회사의 CTO를 찾아가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조언을 구했다.

CTO는 우리가 만든 엑셀 대시보드를 BI 툴로 마이그레이션하는게 어떻겠냐고 말씀해주셨다.
결국 회사의 지원 가능한 범위에 맞춰 AWS QuickSight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마이그레이션 과정이 CTO와 데이터 엔지니어와 함께하는 프로젝트로 진화했다.

나아가, 기존에 우리가 설계했던 거래처 중심의 대시보드에서 더욱 고도화하여 국내 거래처에 세일즈하는 데이터까지 연동시켜 소싱 MD와 세일즈 팀이 함께 쓸 수 있는 대시보드로 만드는 것으로 방향이 결정났다.

나와 사수는 실무자의 입장에서 필요한 데이터들의 테이블을 설계했고, 데이터 엔지니어는 구현을, CTO는 PM의 역할을 하면서 서로 협업했다.

결국 AWS QuickSight를 통해 완성한 CRM 대시보드는 실시간 데이터 시각화를 구현하고, 주요 지표를 효과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의사결정에 지원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내가 속한 소싱 팀은 세일즈 팀에서 요청한 브랜드들을 매일 거래처에 요청해야했기 때문에, 매일 스크럼이 이루어졌었는데, CRM 대시보드를 활용해서 스크럼을 더욱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허나 이 CRM 대시보드가 성공적으로 사업부 전체의 업무에 녹아들지는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데이터 드리븐 의사결정에 친화적이지 않은 사용자라면 쉽게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비즈니스를 지원하는 솔루션은 러닝커브를 고려하고, 사용자 친화적이어야 함을 배웠다.

4. 마무리

마지막 회사에서 두 개의 솔루션을 개발하며, 사용자의 불편함을 찾고 개선하는 것에 매료되었다.

이 과정에서 플랫폼 개발을 담당하는 동료들과 협업하며 나는 개발에 대한 깊은 흥미와 적성을 발견했다.

개발 직무로의 커리어 전환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순간이었다.

스스로 엑셀 매크로를 만든 경험은 곧 코드의 구현이었고, 대시보드를 만든 경험은 곧 데이터베이스의 설계였으며, 첫 회사에서의 경험들은 곧 프로젝트 매니지먼트와 다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CTO님과의 대화는 나의 생각을 확신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나는 개발자의 길을 선택했다.

SSAFY의 마무리를 3개월 정도 남긴 시점에서, 패션 업계에서의 경험들이 예상보다 큰 자산이 되고 있음을 느낀다.

사용자 중심의 기획, 팀원들과의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체계적인 일정 관리 등은 프로젝트의 거의 모든 과정에서 기초가 되었고, 현재 맡고 있는 팀장 역할에서도 실무에서의 경험이 리더십 발휘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앞으로도 나의 경험들이 미래의 개발자 커리어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