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을 마주하는 속마음

2026

2025년 2월을 마지막으로 오랜만에 쓰는 글이자 많이 변화한 내가 쓰는 한 해의 회고.

2월 이후 여러 번의 입사지원과 코딩 테스트를 거쳤지만 취업에는 실패했다.
대신 3월에 소프트웨어 마에스트로에 최종합격했다.

두 가지 생각이 있었다. 아직 나는 실무에 투입되기엔 실력이 부족하다는 판단,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에서 작동하는 제품을 0부터 1까지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때 내가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던졌던 질문은 이거였다.
내가 패션회사에서 일했을 때 기대했던 신입사원의 모습을, 지금의 내가 보여줄 수 있을까?
자존심 상하게도 그러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서류에서 대부분 탈락했던 것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했다. 내가 사용자 지향적인 사람이라고 말해왔지만, 정작 사용자를 유치해 본 제품이 없었다. 차별화가 아니라 "실제로 굴려본 경험"이 비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결론을 내렸다. 실무에 가까운 경험은 결국 제품을 0→1로 만들고, 운영하면서 지표로 개선해보는 경험이라고.

그걸 전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곳이 소마라고 믿었다.

밀도라는 이름의 수업료

결론적으로 내 인생에서 다시는 경험하기 어려운, 아주 밀도 높은 시간이었다. 4월부터 12월까지 주 6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팀원들과 제품을 만들었다.

당시 링크드인에서 흔하게 접하던 이야기가 있었다. 실리콘밸리에서 2~3년 안에 성과를 보기 위해 소규모 팀이 높은 업무 강도를 채택한다는 것. 소마에서도 성과를 내려면 결국 비슷한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마음이 맞는 팀원들과 팀을 이루었다.

처음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질문이 사라졌다. 하루가 너무 빠르게 지나갔고, 내가 만든 것이 누군가의 손에서 실제로 쓰이는 장면을 상상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은 속도였다. 속도가 붙으면 핑계가 줄어든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선순위를 못 정해서였다는 걸 매일 확인했다.

세 가지를 배웠다.

  1. 리소스와 열정의 균형
    하고 싶은 일을 열정으로 밀어붙이다가 벽에 부딪혔을 때, 내가 본 건 실패가 아니라 리소스 낭비였다. "무조건 해보자"의 에너지는 강하지만 방향이 틀리면 팀 전체를 끌고 가서 무너뜨린다. 그 이후로는 같은 열정이라도 먼저 질문을 던지는 쪽으로 바뀌었다. 이게 우리 팀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니면, 지금은 버리는 게 더 빠른가?

  2. 팀으로 일하는 언어
    좋아하는 사람들과 일하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동시에 냉정한 일이다. 감정이 섞이면 일정이 늦어지고, 일정이 늦어지면 신뢰가 흔들린다. 그래서 나는 문제를 "느낌"으로 말하지 않고 관측 가능한 현상으로 말하려 했고, 내 고집을 "취향"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사용자 가치로 번역하려 했다. 합의가 필요한 지점과 독단이 가능한 지점을 구분하는 법도 배웠다. 그 이후로는 의견이 갈릴수록, 먼저 사실을 꺼내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

  3. 분업은 리스크를 나누는 일
    한 팀원에게 스토어 심사 책임이 과하게 몰리면서 일정이 예상보다 늦어지고 팀의 신뢰가 흔들린 적이 있다. 그때 깨달았다. 분업은 역할을 나누는 게 아니라 리스크를 나누는 일이라는 걸. 우리 일정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 하나에 전부 걸려 있을 수 있다는 걸. 그리고 심사나 정책 같은 외부 의존성은 담당자만의 일이 아니라 모두가 수시로 점검해야 한다는 걸.

동시에 체력도 중요했다. 버티는 체력이 아니라 계속 선명하게 사고하는 체력이 필요했다. 하루를 마무리해가는 시간의 열정에 매몰되면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난이도가 높은 오버 엔지니어링을 결심하거나, 타이트한 일정을 잡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그 결과는 늘 다음날 돌아왔다. 팀에게 커뮤니케이션할 시간이 길어지고, 설명해야 할 비용이 늘어났다. 점진적 고도화의 중요성을 배웠다.

커리어

작년 이맘 때 내 마음에 와닿았던 '프로덕트 엔지니어'라는 단어는, 이제 '프로덕트 메이커'로 바뀌었다. 소마에서 제품과 유관한 거의 모든 역할을 수행하며 그 확신이 더 단단해졌다.

내가 생각하는 메이커는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에 가깝다. 기획이 부족하면 기획을 잡고, 디자인이 아쉬우면 디자인을 붙들고, 데이터가 없으면 데이터부터 만든다.
"그건 내 일이 아니다"라는 말이 제품을 망치는 순간들을 정말 많이 봤다. 반대로 "일단 내가 할게"라는 말이 팀을 살리는 순간도 봤다.

프로덕트 매니지먼트, 프론트와 백엔드 엔지니어링, 배포와 운영, 지표 분석, 유저 인터뷰까지. 내가 했던 일들을 역할로 나누면 끝이 없지만, 한 줄로 정리하자면 제품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필요한 일을, 역할의 경계 없이 끝까지 했다.

앱 개발자가 1명인 상황에서 리소스 부족이 심해졌을 때, 내가 앱 개발을 맡아버린 적이 있다. 데드라인을 당길 수 있었다.
또 팀에서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해내야만 하는 그로스 해킹이나 언론 보도와 같은 업무도 "일단 해본다"라는 마인드로 주도했다. 결과적으로는 잘 해냈고, 팀의 생산성에 크게 기여했다.

취업에는 실패했지만, 방향에 대한 확신은 오히려 견고해졌다. 내 목표는 직장인이 아닌, 그 너머에 있다.

넓어진 시야

운이 좋게도 소마에서 미국 단기 연수자로 발탁되어 2주간 미국을 다녀왔다. LA, 라스베가스, SF를 경유하며 CES와 UKF에 참가했고, 실리콘밸리의 창업자와 현직자들과 네트워킹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가장 크게 배운 건 기술이 아니라 질문이 향하는 방향이었다. "어떻게 만들 것인가"보다 "왜 이 문제를 풀어야 하는가"를 먼저 묻는 사람들. 기술 스택이나 구현 방법은 결국 그 다음의 문제였다. 문제를 제대로 정의하면, 해법은 생각보다 빨리 좁혀졌다.

UKF에서 들었던 말은 그 감각을 더 확신으로 바꿔줬다. "시장에 있는 대부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이미 존재한다. 중요한 건 문제를 어떻게 다르게 정의하느냐." 새로운 기술이 답이 아니라, 새로운 정의가 답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말이 내게는 결국 이렇게 들렸다. 제품을 만드는 사람의 다음 단계는 기능을 더 붙이는 게 아니라, 질문의 프레임을 더 잘 잡는 일이라는 것.

AI에 대한 논의도 같은 결이었다. CES의 거의 모든 제품에는 이미 AI가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AI가 있느냐"가 아니었다. 하나의 경험으로 얼마나 자연스럽게 녹아드는가였다. 사용자가 AI를 의식하지 않고도 흐름이 매끄러워질 때, 비로소 가치가 생겼다. AI는 기능이 아니라 경험의 마찰을 줄이는 방식으로 쓰일 때 강해진다는 걸 여러 제품에서 확인했다.

소마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던 구글의 프로덕트 디자이너 멘토님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포지션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고, 실패를 빠르게 반복하며 학습하는 이터레이션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고. 그 말을 듣고 나는 '제너럴리스트'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2025년의 나는 '만드는 사람'이 되려 했다면, 2026년의 나는 '다르게 정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올해는 질문을 바꾼다. 사용자 인터뷰를 할 때는 "무엇이 불편한가"보다 "왜 그 방식을 선택하는가"를 먼저 묻고, 데이터를 볼 때는 숫자의 증감보다 패턴의 변화를 먼저 찾는다. 문제를 다시 정의할수록, 내가 만드는 제품도 더 선명해질 거라고 믿는다.

생활의 단위가 바뀌었다

바라던 대로 진짜 가족을 이루었다. 아주 운 좋게도 신혼부부 임대주택에 당첨될 수 있었고, 그 덕에 빠르게 혼인신고를 마쳤다.
아직도 '와이프'라는 호칭을 다른 사람들에게 꺼낼 때면 입이 어색하지만 그래도 결혼식을 잘 마쳐야겠다.

결혼은 생각보다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 생활의 단위가 바뀌는 일이었다. 내 시간표에 "나"만 있던 칸이, 이제는 "우리"로 바뀐다. 그게 부담이라기보다 든든함에 가깝다는 게 신기했다.

다만 책임이 늘어난 만큼, 내 욕심도 더 정교해져야 한다는 걸 느꼈다. 예전에는 그냥 열심히가 답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무엇을 줄이고 무엇에 집중할지를 더 잘 선택해야 한다. 가족을 지키는 방식은 무작정 달리는 게 아니라, 오래 달릴 수 있게 설계하는 거니까.

그래서 2026년의 나는 열심히라는 말 대신, 지속가능하게라는 말을 더 자주 쓰게 될 것 같다.

올해의 운영 원칙

2025년은 내게 두 가지를 남겼다. 나는 결국 제품을 만들 사람이라는 확신, 그리고 그 확신을 현실로 바꾸려면 속도와 지속가능성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사실.

2026년은 세 가지를 지키고 싶다.

1. 작더라도 꾸준한 이터레이션
완벽한 한 방보다, 작은 런칭 10번이 나를 더 멀리 데려간다. 올해는 분기마다 최소 하나씩, 실제 사용자가 쓸 수 있는 형태로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는다. 규모는 작아도 괜찮다. 중요한 건 피드백 루프를 계속 돌리는 것.

2. 몸과 리듬
판단력이 흐려지는 순간이 가장 비싸다. 체력은 자기관리의 문제가 아니라 제품 퀄리티의 문제다. 균형 잡힌 하루를 보낸다. 무리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다음 날의 나를 빚지지 않는 하루.

3. 관계를 쌓는 방식
신뢰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약속을 지키고, 기대치를 맞추고, 피드백을 빠르게 반영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그리고 특히 올해는 먼저 연락하는 사람이 되려 한다.

취업 실패는 여전히 아쉽지만 그 아쉬움이 나를 갉아먹지는 않는다. 2025년의 나는 결국 멈추지 않았고, 멈추지 않는 사람은 언젠가 도착한다는 걸 믿게 됐다.

2026년을 마주하는 속마음은 단순하다. 나는 결국 만들 것이다. 더 꾸준히, 더 선명하게.